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1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도 당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이야 '한국인'이라 말하지만, 오랫동안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챙겨주지 않았는데요.
76년 만에 우리 정부 도움을 받아 민단이 위령비를 세웠습니다.
가는 길마저 서럽고 억울했던 사람들을 추모하는 날, 하늘에서도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합니다.
<세계를 가다> 김범석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네 살 때 일본으로 건너와 나가사키에서 한식당을 58년 운영한 올해 95살 권순금 할머니.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구름을 목격한 것은 19살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중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뒤 직접 피폭된 여동생들은 원인 모를 지병에 시달렸고 권 할머니도 평생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권순금 / 나가사키 원폭 피해 1세대]
"펑하고 나가보니 하늘이 컴컴했고, 하늘에 검은 구름이 낀 줄 알았습니다. 원폭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몰랐잖아요."
"한국은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원폭 피해자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피해가 광범위하고 명부도 사라져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두 도시에 있었던 한국인 피해자는 약 7만 명, 4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됩니다.
히로시마와 달리 군함도 징용 한인을 포함해 최대 1만 명이 숨진 나가사키에는 그동안 한국인 희생 추모비가 없었습니다.
[효과음]
"줄을 당겨주세요!"
희생자의 넋을 달래는 높이 3미터의 비석이 76년 만에 세워지는 날 나가사키의 하늘도 울었습니다.
위령비 사업을 추진했던 건립위원회는 '강제징용' 배경이 담긴 비문 문장 등을 놓고 27년 동안 일본 측과 평행선을 달렸습니다.
"결국 시 당국이 반대한 강제 징용 표현 대신 '본인의 의사에 반해'라는 표현을 넣었습니다."
대신 6년 전 주 유네스코 일본 대사의 표현대로 "강제로 노역했다"는 내용을 영어로 담았습니다.
[오오쿠마 유카 / 고교생평화대사]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부터 (중요하다 생각해요)"
[히라노 노부토 / 평화활동지원센터소장]
"(차량 백미러는) 앞으로 진전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발상이 중요합니다."
권 할머니도 76년 전 검은 구름의 악몽에서 이젠 조금이나마 벗어났습니다.
[권순금 / 나가사키 원폭 피해 1세대]
"그건, 감격입니다.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나가사키에서 채널A 뉴스 김범석입니다.
김범석 도쿄 특파원
영상취재: 박용준
영상편집: 이희정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